Chapter Text
레아 공주는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나 만든 이의 취향 따윈 알 수 없는 칙칙한 회색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자가 흔히 겪는 공포나 후련함도 전혀 없었다. 한 시간 전 얼데란이 폭발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공포와 눈물(펑펑 울지 않았다. 제국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었다.)은 그때 다 겪었다.
분하다. 앞으로 살날은 전부 반란군에게 도움이 되도록 쓰고 싶었는데. 나의 임무가 벌써 끝을 맺다니. 수십만 명을 일 초 만에 소멸시킨 사악한 제국을 내버려두고 죽어야 한다니. 그녀는 다시 한번 손을 뻗는다. 천장과 바닥 군데군데를 만지며 재확인한다.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빠져나갈 방법이 전무했다.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기 어려웠다.
누군가 구하러 올까. 반군은 그녀의 구출에 쓸 병력이 없었다. 그들은 레아가 전송한 행성 살해 우주선의 설계도로 새로운 작전을 수행하기에도 벅찼다.
상황이 젠장 맞을지라도 포기해선 안 된다. 주먹을 꽉 쥐었다.
픽-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 안이 급속도로 서늘해졌다.
"얼굴빛이 팔팔한 걸 보니 여태 정신을 못 차렸군. 지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유언은 내 친히 반군에 전해주겠소."
"나에게 배정된 자가 당신이라니. 제국은 군인이 남아도나 보네요. 아니면 고작 사형수 배웅이나 맡길 정도로 추락했나요, 다스 베이더?"
그새 황제의 신임을 잃었나요? 중요한 설계도를 지키는 데 실패해서? 레아는 턱을 치켜든다. 곧 죽을 목숨이라 이판사판으로 내뱉었다.
"궁지에 몰린 쥐의 발악치곤 형편없군. 그것도 여기까지오.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으면 하오."
그가 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힌다. 축축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로 뿜어져 나온다. 얼데란 산맥처럼 커다란 몸집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것만 같다.
"그대는 사형수요. 제국에 반하는 불손한 여자요. 그대를 위해 수고스럽게 제국의 전기나 탄창을 낭비하지 않으려 내가 이곳에 왔소."
가죽 장갑이 레아의 목을 쥔다. 검고 큼직한 손에 비해 희고 여리디여린 목이었다.
분명 죽음은 두렵지 않았는데, 공포의 화신이 엄습하니 식은땀이 흐른다. 목덜미가 섬찟하다. 현재는 가만히 쥐기만 했지만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녀의 목은 우지끈 꺾일 것이다.
작은 숨결이 떨리기 시작하자 베이더는 목을 놓았다.
"허나 자비를 베풀겠소. 그대는 지상을 뜨는 대신 나의 노예로서 살아가시오. 이것은 명령이고 그대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소."
레아는 자신의 목을 매만진다. 단순히 쥐기만 했기에 손자국은 남지 않았다. 훅 끼치던 공포가 사라지자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닥쳤다. 납득할 수 없어 단박에 반박했다.
"뭐? 싫어요! 나는 얼데란의 공주이며 제국 상원의 의원──"
"의회와 얼데란은 소멸했고 그대가 반란군과 엮였다는 정황은 명료하오! 명을 보전하고 싶다면 내 말에 따르시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 죽을 거예요! 사형대로 보내요!"
돌연 이상한 힘이 그녀를 휘감는다. 소문을 익히 들었다. 제국의 괴팍한 최고사령관은 교살을 즐긴다고. 구 공화국의 제다이가 쓰던 불가시의 기묘한 힘으로 숨통을 조인다고.
레아는 말을 멈추고 다급히 자기 목을 만졌다. 압력은 없었다. 방금 전만 해도 바닥을 디디던 그녀가 공중에 둥둥 떠 있을 뿐이다.
포스를 경험해 본 건 10살 무렵 오비완에게서였다. 추락하던 그녀를 허공으로 띄웠던 할아버지 제다이⋯ 같은 신비를 추억할 틈을 그는 주지 않았다.
"교육이 다분히 필요하겠군."
베이더가 소름 끼치는 기계음을 내뱉으며 레아를 내려놓았다.
그의 뒤에 있던 문이 완전히 닫힌다. 불구덩이에 빠졌다 나온 드로이드처럼 새카만 남자가 독방에 들어찬다. 둘이라 안 그래도 좁은데 자칭 노예주는 덩치까지 막대하다. 자연스레 압박감을 느끼게 만든다. 레아는 몸을 움츠리고 벽에 달라붙었다.
"스스로 의복을 벗으시오. 실오라기 하나 없이 모조리. 거부한다면⋯ 손수 탈의를 도와주지."
그가 손을 올린다. 투명한 손길이 그녀의 벨트를 훑다가 기어코 잠금을 풀어낸다. 수도원 로브 같은 흰 천 조각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저지했다. 드레스가 홀로 벗겨지지 않도록 움켜쥐고 베이더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는 포스를 멈춘다.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본다. 완고한 벽처럼 서서, 반항해 볼 테면 해 봐, 아까처럼 벗겨줄 테니⋯ 라는 듯했다. 불복종의 결과를 일러주었으니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꼭두각시나 먹잇감처럼 다른 이에게 조종당하는 건 죽도록 싫다. 특히나 그녀의 주인이라 참칭하는 제국 개에게는. 함부로 벗겨지는 것도 싫었다. 소녀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마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저울질 끝에 결국 튜닉 드레스를 직접 벗어 내렸다. 천이 그녀의 살갗을 타고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진다. 평소와 동일한 감촉일 텐데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몸은 벌벌 떨린다. 유륜과 사타구니가 훤히 드러나 무방비하게 느껴진다. 제국의 차가운 의자에 성기가 닿아 섬뜩하다.
고개를 들면 검고 거대한 남자가 보인다. 마스크 너머 시선이 적확히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녀를 응망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개자식. 헬멧 안에서 변태처럼 히죽이고 있겠지. 미술품 보듯 감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음흉한 얼굴을 상상하니 징그러워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레아의 투쟁심에 불이 붙고 떨림이 한결 가라앉았다.
"날 강간할 건가요?"
"그대의 나신을 모두가 보게 하겠소. 먹음직한 유방과 샅은 트루퍼 사이에 퍼지겠고 금세 반군 귀에도 들어가겠지. 그대가 공주 전하로 남을지 구설수로 산화할지⋯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되겠군."
뭐라고? 레아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구상이 들려왔다.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치욕으로 붉게 물드는 대신 창백하게 질린다. 숨 멎은 것처럼 충격에 빠져있다가, 한 박자 늦게 눈물이 질금 어렸다. 몸뚱이가 사시나무가 되어 후들거린다. 입술을 달싹인다.
나는 반군의 일원이에요. 나의 알몸이 퍼져 은하계의 웃음거리가 된다 하여도 그들은 동료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수치나 전락으로 여기는 대신 감싸주겠죠. 다스 베이더, 반란군은 당신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고결한 사명은 추잡한 가십에 무너지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확신이 부족했다. 레아의 소망대로 미래가 밝을 거라는 믿음도. 베이더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도. 늑대 앞에 놓인 흰 양처럼 무력하고 불행했다. 그가 살가죽을 벗겨 전시해 놓겠다 하면 닥칠 상황에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는 양이었다. 그 살가죽이 얼마나 고가로 팔릴지, 내 가족조차 향유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일지, 괴담이자 현실을 들으며 속절없이 무너져간다.
"공주는 지도자가 아니오. 흰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웃는 마스코트지. 설령 지도자라도, 더는 지켜줄 아비가 없는 어린 여자는 쉬이 가치를 잃기 마련이오. 확신하건대 그대는 대체될 거요.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소."
그녀는 눈물을 참기 버거워했다. 반응을 관찰하며 멈춰있던 베이더는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기계음은 고조 없이 잔인한 사실을 적시한다. 비인간적으로 그녀를 몰아넣는다.
레아는 두 주먹을 겨우 쥐었다. 대답해야 했다. 무엇이라도 말해야만 했다.
"⋯⋯당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다스 베이더. 제국의 총사령관이 벌이기엔 품위 없고 저열한 기행이니까요. 평판이 추락하고 군의 사기가 가라앉을 거예요."
담담하게 위장한 애원조가 흘러나온다. 훌쩍이는 목소리를 다잡으려 애썼다. 그녀는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총사령관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나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소."
그가 즉시 대답했다. 내뱉은 말을 덮으려는 듯 빠르게 덧붙였다.
"공주는 모르겠지만 평판과 사기, 품위는 힘에서 나오오. 원치 않아도 강한 힘엔 복종해야만 하지. 오직 힘만이 모든 것을 이기니까. 그것이 세상 이치요."
그만의 이론을 줄줄 읊는다. 그 모습은 묘하게도 레아를 향한 협박보단 흡사 자기 세뇌로 보였다.
"저항은 무의미하오. 위구심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대의 주인에게 의지하시오."
베이더가 망토의 한쪽을 펼쳐 보인다. 그대로 정지한 채 그녀를 쳐다본다.
무슨 의미지? 이야기와 행동의 비약이 심했다. 파도가 휘몰아칠 땐 피하고 잠잠해지면 가까이 가서 고기를 잡아야 하는 어부가 된 기분이었다.
레아는 마지못해 그에게 다가갔다. 가죽 손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끌어당겼다. 작은 맨발을 군홧발에 올리고 안기듯이 기계 신체에 밀착하도록 했다. 그는 레아가 품에 붙자 망토를 커튼처럼 쳤다. 빛이 차단되어 시야가 깜깜해진다.
완벽히 가려졌다. 대중들은 그녀의 알몸을 볼 수 없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옷을 벗기지 말지 그랬어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최악의 형편은 면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제기랄, 전부 레아를 복종시키려 치밀하게 짠 공갈이다. 짜맞춰져 가는 악의가 선명한데도 피할 수 없다는 게 지독했다.
커튼 밖에서 픽- 공기가 빠지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탑승한 신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떨어지면 안 된다. 바오밥나무에 매달린 어린 동물같이 팔에 힘을 준다. 그에게 꼭 달라붙는다. 패널이 흉곽에 닿았다. 딱딱한 듀라스틸 촉감에 그녀가 찌푸린다. 초록색과 붉은빛을 뿜는 망할 버튼을 아무렇게나 눌러주고 싶었다.
그와 걷고 또 걷는다. 어느샌가 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행 좌표를 0-4-7로 이동해라, 알겠습니다⋯ 같은 내용을 보니 함교인가 보다. 베이더는 레아를 망토 안에 넣은 채 업무를 처리했다.
그녀는 기밀을 엿들으려 귀를 쫑긋 세우다가도, 그가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움찔했다. 망토 틈이 벌어져 빛이 들어온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더욱 바싹 접촉할 수밖에 없다.
"⋯하지 마세요. 이러다 보이겠어요⋯."
레아의 속삭임은 부하에게 지시하는 기계음에 묻혔다. 스피커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것처럼 전신이 울릴 뿐이다.
"하지 말라고요⋯."
베이더는 무사태평하다. 손을 들었다가도 금방 내려놓는다. 그녀가 발을 헛딛도록 급하게 멈추거나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레아의 요청에는 묵묵부답이다.
그녀만 조마조마하다. 심장을 졸이며 바닥으로 미끄러진 발을 다시 군화에 올린다.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려 매진한다. 호흡마저 깊은 진동에 맞추고 희미한 소독약 냄새까지 맡아냈다.
문득 암흑 속에서 구강이 툭 튀어나온 구조의 헬멧을 올려다본다. 두상과 목의 이음새가 신경 쓰인다.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 향은 갑옷이 아닌 살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의문을 가질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베이더는 군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갑작스러운 행진에 병사들은 홍해의 기적처럼 흩어졌으나 개중엔 굼뜬 자도 있기 마련이다. 비틀거리는 트루퍼, 뒤늦게 비켜서는 트루퍼⋯ 어리바리한 네다섯 명이 레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엉덩이와 팔다리에 타인이 닿자, 그녀는 식겁했다. 갑주 모양대로 살이 눌려 자국이 남을 만큼 달라붙는다. 기척이 사그라들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하지 말라는데 왜 말을 안 듣죠? 귀가 먹었나요?"
트루퍼의 인적이 사라지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참다못한 레아가 바로 언성을 높여 쏙닥인다. 따지는 말본새가 잔뜩 날 서 있다.
"주인님도 베이더 경도 붙이지 않고 부르니 말이오."
그제야 베이더는 회답했다. 어처구니없는 사유를 덧붙이며.
"금일부터 내 너른 마음으로 노예인 그대를 지킬 텐데. 본래 그 역할은 베일 오르가나였지 않소?"
"⋯그래서요?"
그녀는 아버지께 보호받기만 했던 소녀가 아니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이기에 꾹 참는다. 당장이라도 베이더가 망토를 펼쳐 그녀의 나신을 군중에게 공개할 것 같았으니까.
"'아빠(Daddy)'라고 부르시오. 내가 중단하길 바랄 때마다, 나에게 간청하고 싶을 때마다."
"미쳤어요?"
"판단은 내가 하오. 그대는 따르기만 하시오."
통보한 후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장구한 시간이었다. 레아의 체감상 베이더는 데스 스타 전 구역을 돌아다녔다. 승무원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몸소 체크한 것 같았다. 반항기를 죽이려는 저의겠지. 이리저리 휩쓸린 그녀는 기력이 쏙 빠졌다. 멍청한 호칭을 안 쓰고 버틴 게 용했다.
마침내 그가 정지한다. 끔찍한 유람이 그쳤다.
⋯안 그쳤을지 모른다. 패널 불빛과 비인간의 가슴팍만 보여서 알 수가 없다. 숨소리가 소란스러워 인기척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주변을 파악하기에 꾸역꾸역 집중하는데.
불현듯 새까만 두 팔이 올라갔다. 지금껏 하지 않던 큰 동작이었다.
낯빛이 백지장처럼 하얘진다. 위험하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장막이 열어젖혀질 것 같다.
"아빠. 아빠⋯."
레아가 망토 자락을 붙잡는다. 촉급히 (자칭) 보호자를 처음으로 불렀다.
그는 거짓말처럼 팔을 내린다. 망토를 매만지더니 그녀의 불안을 배려하듯 꽁꽁 여몄다. 태도를 극적으로 탈바꿈하며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복종하는 대가는 충분히 달콤할 것이라고.
"⋯좋소. 그대가 지내게 될 은신처이자 피난처요. 내리시오, 공주(Your highness)."
그가 몇 걸음 디디더니 멈춘다. 공기 빠지는 소리가 거듭 났다. 어딘가로 들어왔고, 문이 닫혔나 보다.
레아가 망토 끝부분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바깥에서는 진한 갈색 눈만 보일 만큼. 시선에 들어오는 트루퍼나 승무원은 없다. 이곳은⋯ 놀랍게도 방인 듯하다. 앉고 서는 행위밖에 할 수 없는 옹색한 감옥이 아니라 제법 널찍한 방.
그녀는 베이더를 흘깃 쳐다보고는 거침없이 장막을 젖혀 빠져나왔다.
맨발로 둘러본다. 널따랗지만 삭막했다. 온통 무채색이었다. 어제 건설했는지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정보가 전무하다. ⋯익숙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만 뺀다면.
"나의 방인가요?"
"나의 방이지."
그녀가 성큼 걸어가더니 침대에 앉는다. 이불을 집어 코에 대자 소독약 냄새가 흐리게 났다. 이거였구나.
원인을 확인하고 임시방편으로 회색 이불을 몸에 감아 덮었다. 벌거벗은 채 있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용기를 내 협상을 걸었다.
"입을 옷을 줘요. 들어줄 때까지 비키지 않겠어요."
"그대 자신이 나와 거래할 수 있는 주체라 보시오? 공주는 노예요."
안 통했다. 침대를 걸고 협의하기는 역시 무리였나. 그녀도 즉흥적으로 꺼낸 수라 별 미련은 없다. 그가 또 음흉한 기행을 벌일지 모르기에 서둘러 자리를 옮길 셈이었다.
"이번만이오. 다음은 침대가 아니라 반군의 목숨을 걸어야 할 거요."
하얀 튜닉 드레스와 속옷이 공중을 부유하며 배달되었다. 그녀 옆에 툭 떨어진다. 베이더가 갑옷 속에 넣어 챙겨왔나 보다. 영영 작별하는 줄만 알았던 옷을 바라보다 다시 시작된 으름장에 그를 응시했다.
"미리 이름을 대도 좋소. 공주가 부르는 인물과 눈물겨운 재회를 하게 해줄 테니."
레아는 표정으로 언짢음을 역력히 드러냈다. 입을 열어 대든다면 베이더가 곧장 아는 얼굴을 잡아 와 처형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곧 불을 끌 테니 어서 착의하라는 명령을 내리곤 그대로 했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사령관의 하루는 끝났고 노예의 하루도 덩달아 끝을 맺었다.
공주의 하루는 이제부터였다.
겁 없이 문 개폐 버튼으로 추정되는 것을 눌러보고(젠장, 열리지 않았다! 제국의 사악한 노예주가 잠가놓았다!), 빠져나갈 수 있는 환풍구가 있는지 샅샅이 살핀다.
탈출은 불가했다. 제일 큰 구멍이 그녀의 다리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베이더는 앉은 채 벽에 기대어 취침 중이다. 그를 제압할까 잠깐 고민했으나 포기했다. 방에 그럴 도구가 절무했을뿐더러 그는 여전히 괴상한 헬멧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웬만한 공격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최소한 블라스터는 있어야 했다.
서랍을 이곳저곳 열어보았다. 여닫는 소리는 '스읍── 하──⋯⋯'거리는 요란한 호흡기에 묻혔다.
레아가 각별히 주의하며 조사한 사적인 수납함은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드로이드 부품 몇 가지가 전부였다.
이 남자는 검은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기이한 치한이 아니었는가? 노예를 데려오기 전 방을 깔끔히 비웠거나, 평상시 명상만 즐기는 수도승이거나, 기가 막혀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몽땅 터무니없었다. 허무한 수확만 뚜렷해졌다.
"끄, 으으⋯⋯."
신음이 들린다. 육체에 불이 들끓는 악마가 고통을 토해내는 불길한 소리가. 한편으로는 애처롭고 처량하게 앓는 소리가.
깜짝 놀란 레아가 고개를 돌린다.
컴컴한 암흑. 패널만이 유일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작은 초록빛과 붉은빛 여러 개가 또렷하게 발광하며 음산한 광경을 연출한다. 살아있는 드로이드처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변조를 뚫은 신음은 딱한 병자 같았다.
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주인을 향해 레아는 무심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요?'를 가까스로 삼킨다.
이건 기회다. 진실을 가리려 무자비하게 표백된 듯한 방에서, 하나밖에 없는 진짜다.
다스 베이더의 가면 너머엔 무엇이 존재할까. 레아가 알기로, 반군이 여러 방면으로 입수한 수많은 정보에도 베이더의 맨얼굴이나 정체에 관련된 건 없었다. 그는 그저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수수께끼의(누군가는 매니악한 취향이라 했다.) 전신 갑주를 착용하고 사방을 공포로 유린하는 총사령관이었다. 그 이상은 아무도 몰랐다. 제국조차 모르는 듯했다.
어쩌면 데스 스타의 약점이 담긴 설계도보다 중요할 수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겠다는 호기심과 반란군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열의⋯ 그녀를 자석처럼 당기는 묘한 이끌림이 한데 모인다.
고양감은 두려움을 태우고 무모함을 낳는다. 레아는 손을 뻗는다.
베이더는 황제의 살인용 드로이드일까. 월허프 타킨처럼 제국 이인자다운 심술궂은 중년일까. 변태 페티시에 걸맞은 푸른 수염의 낯짝을 가졌을까.
미지를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투구의 이음새를 조심스레 벌린다. 그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슬아슬한 순간은 영원 같았다.
숨이 턱 막힌다.
목에 닿을 만큼 길고 곱슬한 머리카락과 뚜렷한 이목구비, 한쪽 눈가의 기다란 흉터, 지치고 오만해 보이는 얼굴. 로미오가 현현한 미남이 마스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상을 뒤집은 것도 모자라 뒤엎어 엉망이 되도록 섞은 수준이었다. 나이도 어림짐작하여 레아보다 열 살가량 많아 보였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미모도 미모지만, 레아를 가장 소스라치게 한 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감각이었다. 그에게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근함이 느껴졌다.
기묘한 기시감이 뼛속 깊이 엄습하는데도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 가령 서너 살에 본 부모님 친구일까.
⋯⋯베이더가? 베일 오르가나와 브레하 오르가나는 잔혹한 군인과 알고 지낼 사람이 아니다.
길가에서 스쳐 지나간 행인일까. 아니, 어떤 가정도 말이 안 됐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미남을 뜯어보며 기억을 뒤진다. 눈을 뗄 수가 없다. 프시케는 촛농이 흘러내리는지도 모르고 무아지경에 빠져 에로스를 목도할 뿐이다.
그녀가 거울을 바로잡으려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뻗는다.
돌연, 눈꺼풀이 들썩인다.
베이더가 깼다. 알지 못하는 인간의 눈동자가 레아를 응시한다.
그녀는 심장이 철렁했다. 쿵쿵 뛰며 스스로를 조여온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본 죄악감이 휘몰아쳤다. '죄송해요'라 사과하려는 찰나.
"파드메."
베이더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잠에서 덜 깼는지 시선이 멍했다. 그의 푸른 눈앞에 있는 레아가 아니라 헛것을 마주하는 듯했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고 정정도 하지 못했다. 게슴츠레 뜬 눈이 찬찬히, 집요하게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수십 년을 짊어진 무거운 눈길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목은 괜찮아? 아프지 않아?"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않던 그가 다정하게 묻는다. 어투에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있다.
당황한 레아가 손을 들어 목을 황급히 더듬는다.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눈을 거듭 깜박이며 입술을 덜덜 떨더니 울 듯한 표정이 된다.
"미안해⋯⋯⋯⋯."
베이더 안에 있는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레아의 뺨에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 스친다. 목덜미에선 뜨거운 숨결이 느껴진다. 괴로운 신음은 더 괴로운 사죄로 변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온몸으로 울었다.
레아는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안겨 있었다. 뿌리치거나 밀어내지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거나 마주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저 가만히. 정처 없는 격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멈춰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른 호흡 소리가 들렸다.
온기가 있는지 없는지 애매한 갑옷에 힘이 빠져있다. 그는 잠들었다.
레아도 마찬가지로 곧장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10살에 인퀴지터의 마인드 트릭을 버텨낸 강인한 정신이지만, 금일은 몹시 다사다난했다. 특히나 마지막이 너무도⋯⋯.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레아는 슬쩍 팔을 뺐다. 베이더의 비밀을 들추어냈다는 걸 당사자가 알면 안 된다.
내려놓았던 괴물 마스크를 다시 그에게 씌운다.
깨어나지 않도록(두 번째 기상엔 미남이 아니라 '다스 베이더'가 눈을 뜰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밀한 기술이 필요했다.
신경을 극한까지 곤두세우고 정신력을 깡그리 소진했다. 레아 공주는 기진맥진하여 그의 품에서 잠에 들었다.
